[메가경제 유원형 기자] 대법원은 대한민국의 최고 법원이자 사법부의 최고 기관인 대법원에서 ‘재판 거래’ 의혹 같은 낯설고 불편한 용어들이 터져나오면서 국민들의 마음을 심란하게 만들고 있다. 그런데 이번에는 엉뚱하게 정보통신(IT) 전문용어가 불쑥 튀어나왔다. ‘디가우징’이라는 용어다. 이 용어는 전문 종사자나 컴퓨터에 해박한 사람들이 아니고는 아는 사람이 거의 없을 만큼 일반인들에게는 너무나 생소한 단어다.
이 용어는 26일 돌연 등장했다. ‘재판 거래’ 의혹을 받고 있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박병대 전 법원행정처장(전 대법관)의 컴퓨터 하드디스크가 ‘디가우징’ 됐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논란이 일고 있다.
26일 검찰 등에 따르면 대법원은 이날 ‘재판 거래’ 의혹을 수사하고 있는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부장검사 신자용)에 확보 중이던 자료를 건넸다. 자체 조사 과정에서 검토된 410건에 대한 원본 파일 등 A4 3~4박스 분량이다. 다만 공무상 비밀 관련 문건이 다수 포함됐다는 이유 등으로 검찰이 강하게 요청한 하드디스크 원본은 제출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검찰은 의혹의 실체를 규명하기에 턱없이 부족한 자료라고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다. 410건의 문서의 경우 대법원이 자체조사한 저장매체(HDD·SSD) 5개를 기준으로 했을 때 0.1%에 불과하고, '사법부 블랙리스트' 의혹 이후 불거진 '재판 거래' 의혹과는 접점이 뚜렷하게 없다는 주장이다. 의혹 해소를 위해서는 추가 자료가 필수적이라는 게 검찰 판단이다.
이와 함께 검찰은 법원행정처가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박병대 전 법원행정처 처장 컴퓨터 하드디스크가 디가우징(Degaussing) 된 사실을 전달했다고도 알렸다.
양 전 대법원장 컴퓨터의 경우 퇴임 이후인 지난해 10월 이 작업이 진행됐다는 게 검찰 설명이다. 증거인멸 우려를 강조함으로써 강제 수사 명분을 쌓으려 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는 이유다.
27일 대법원에 따르면 양 전 대법원장이 사용하던 컴퓨터 하드디스크는 지난해 10월31일에 디가우징으로 폐기됐다. 그해 9월22일에 양 전 대법원장이 퇴임한 지 한 달여 뒤다. 박 전 대법관의 컴퓨터 하드디스크는 지난해 6월1일 퇴임 때 폐기됐다.
‘디가우징’이라는 게 무엇인가? 디가우징(Degaussing)은 간단히 말해 하드디스크 등 저장장치를 물리적으로 복구하지 못하도록 하는 방법이다
일반적으로 컴퓨터에 저장된 정보를 삭제할 때는 키보드에 있는 ‘딜리트(delete) 키’를 눌러 정보를 지운다. 하지만 이렇게 파일을 지우면 물리적으로는 완전히 삭제했다고 할 수 없다. 하드디스크에 흔적이 남아 있어 복구 프로그램을 돌리면 복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컴퓨터 등에서 데이터는 자기구역(magnetic domain)으로 불리는 매우 작은 영역에 대해서 자기(磁氣)의 배열을 바꿔 자기장(磁氣場)의 방향을 변화시키는 방법으로 하드디스크, 플로피디스크, 테이프 등의 자기 미디어에 기록된다.
컴퓨터에 저장된 정보의 복구를 원천적으로 차단하고자 할 때 ‘디가우징’을 행한다. 강한 자기장을 이용해 파일을 제거하는 방식이다. 이렇게 하면 저장장치가 훼손되기 때문에 아무리 복구 프로그램을 동원해도 되살릴 수 없다.
‘디가우저(Degausser)'라는 장비에 하드디스크를 넣고 작동시키면 하드디스크의 저장장치와 플래터가 망가져 모든 기록이 복구 불능의 상태가 되는 방식이다. ‘디가우저’는 ‘자기(磁氣)’를 없앤다는 뜻에서 ‘소자(消磁) 장비’라고도 한다. 플래터(Platter)는 데이터가 기록되는 얇은 판으로 데이터를 기록하기 위해 산화철 등의 자성체로 코팅되어 있다.
디가우징이라는 용어는 독일의 수학자였던 칼 프리드리히 가우스(Carl Friedrich Gauss 1777~1855)의 이름에서 따왔다. 가우스는 대수학·해석학·기하학 등 여러 방면에 걸쳐 위대한 업적을 남긴 19세기 최대의 수학자였지만 전자기학(전기자기학)의 기초 확립에도 뛰어난 공헌을 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박병대 전 법원행정처장(전 대법관)의 컴퓨터 하드디스크가 왜 ‘디가우징’됐고 어떤 부분이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일까?
이 ‘디가우징’ 논란과 관련해 대법원은 직무 특성상 내부 규정과 절차에 따라 대법원장과 대법관의 컴퓨터 하드디스크를 폐기 처분하는 것이 원칙이라고 설명했다. 전산장비운영관리지침과 통상의 절차에 따라 양 전 대법원장과 박 전 대법관의 하드디스크도 디가우징됐다는 것이다.
대법원은 논란이 되고 있는 하드디스크 디가우징 건은 양승태 전 대법원장 등이 직접 지시한 것으로 김명수 대법원장이 결정한 것은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김 대법원장이 추가조사를 결정한 것도 지난해 11월3일이며 조사활동은 보름여 뒤에 시작돼 하드디스크 폐기 시점과는 차이가 있다고 밝혔다.
하드디스크는 각 실국에서 직접 폐기하는 경우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디가우징 장비가 있는 대법원 전산정보국 분실로 보내 전산담당자와 전산장비관리 외주업체 직원이 폐기 처분을 한다고 덧붙였다.
대법관 이상 하드디스크 폐기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 이전에도 있었다고 밝혔다. 지난 2012년까지는 디가우징이 아닌 이레이징(erasing·프로그램으로 파일 삭제) 방식으로 복구불능 상태를 만들어 폐기했다는 것이다.
그 뒤 퇴임 대법관이 없어 폐기할 일이 없었지만 차한성 전 대법관이 2014년 3월 퇴임하면서 사용하던 하드디스크를 분당의 전산정보센터에서 디가우징했다. 이후 대법원에 장비가 들어와 디가우징을 통해 폐기하고 있으며 이상훈·이인복 전 대법관 등 다른 대법관들도 마찬가지라고 밝혔다.
하지만 검찰은 이번 양승태 전 대법원장 PC 등의 디가우징 건의 경우 '사법부 블랙리스트' 의혹이 한창이던 때에 작업이 이뤄졌다며 증거인멸 우려를 내비치고 있다. 검찰이 ‘디가우징’ 사실을 알린 것은 증거인멸 우려를 강조함으로써 강제 수사 명분을 쌓으려 한 것이 아니냐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다만 검찰이 대법원을 상대로 압수수색 등 강제 수사에 즉각적으로 나서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대법원이 제출한 자료 분석과 함께 자료 추가 확보 방안 등을 검토한다는 게 검찰 판단이다.
이런 판단의 배경에는 대법원이 전산장비 운영 관리 지침을 따른 정상적인 절차라고 해명하고 있는 점, 하드디스크 임의 제출 가능성이 열려있다고 밝힌 점도 고려된 것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법원이 지속적인 검찰의 자료 제출 요구에 응답하지 않을 때는 강제 수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어 귀추가 주목된다.
대법원의 전산장비 운영관리 지침 관련 설명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은 하드디스크가 ‘디가우징’됐다는 사실을 납득하지 못하고 있다. 대법원장이든 대법원 판사든 공무를 집행하고 있는 이상 자료를 마음대로 폐기하는 게 국민의 눈높이에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들이 이어지고 있다. 불법적으로 이뤄진 경우라면 몰라도 합법적으로 그같은 지침이 공적 업무 기록에 적용되고 있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재판 거래’ 의혹 검찰 수사과정에서 확인된 하드디스크 ‘디가우징’ 논란이 앞으로 어떤 식으로 전개될지, 또 향후 검찰의 수사가 어떻게 진행될지 전 국민의 시선이 쏠리고 있다. 어떤 경우든 간에 사법부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는 더욱 흔들릴 수밖에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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