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심 라면 전세계 100여 개 나라서 팔려...글로벌 일류 식품회사 도약 이끌어
[메가경제=이석호 기자] 농심 창업주인 ‘라면거인’ 율촌(栗村) 신춘호 회장이 27일 새벽 영면에 들었다. 향년 91세.
농심 관계자에 따르면, 최근 건강 악화로 서울대병원에 입원해 있던 신 회장은 이날 오전 3시 38분께 지병으로 별세했다.
고인은 1930년 12월 울산광역시 울주군 삼동면에서 부친 신진수 씨와 모친 김필순 씨의 5남 5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형제 중 9살 터울 맏형인 고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은 지난해 1월 세상을 떠났다. 둘째 형 신철호 전 롯데 사장도 지난 1999년 별세했다. 이외에도 형제로는 넷째 신선호(87) 일본 산사스 회장, 막내 동생 신준호(80) 푸르밀 회장, 막내 여동생 신정희(75) 동화면세점 사장 등 있다.
신 회장은 1954년 김낙양(91) 여사와 결혼해 신현주(농심기획 부회장), 신동원(농심 부회장), 신동윤(율촌화학 부회장), 신동익(메가마트 부회장), 신윤경(서경배 아모레퍼시픽 회장 부인) 등 3남 2녀를 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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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춘호 농심 회장 |
그는 1958년 동아대를 졸업한 그해 롯데 부사장을 맡아 신격호 명예회장을 도와 제과사업을 함께 시작했다. 일본에서 사업을 하던 1963년부터 독자적인 사업을 준비했다.
그가 서른다섯이 되던 1965년에는 ‘시기상조’라는 신 명예회장의 만류를 뿌리치고 단돈 500만 원 자본금으로 롯데공업을 차려 독립했으며, 사명을 ‘농심’으로 바꿔 본격적으로 라면 사업을 시작했다. 이후 두 형제는 서로 왕래를 하지 않았다.
창업 당시 신 회장은 일본에서 라면이 큰 인기를 끌고 있는 모습을 목격하고 한국에 돌아와 “한국에서의 라면은 간편식인 일본과는 다른 주식이어야 한다”며 “값이 싸면서 우리 입맛에 맞고 영양도 충분한 대용식이어야 먹는 문제 해결에 큰 몫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사업을 일으켰다.
농심은 1960년대 국내 라면시장에 업체들이 난립하는 가운데 치열한 경쟁을 펼치며 어렵게 생존해 왔지만, 1970년대 들어 ‘닭고기’ 국물이 대세이던 당시 라면업계 추세에서 ‘소고기 라면’을 출시해 큰 성공을 거뒀다.
이후 1980년대에는 너구리를 비롯해 육개장 사발면, 안성탕면, 짜파게티 등이 연속 히트를 기록하며 파죽지세를 보이다가 1986년 향후 한국 라면 대표 자리에 오르는 신라면을 출시하면서 신 회장이 마침내 ‘라면왕’ 타이틀을 거머쥐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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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2년 사발면 출시 시식회의 중인 신춘호 농심 회장(가운데)의 모습 [사진=연합뉴스] |
특히, 그는 브랜드 전문가로서 자질이 탁월했다. 신라면은 당시만 해도 상품명에 회사이름을 뺀 파격적인 이름이었다. 매울 ‘신(辛)’이라는 한자를 상품명으로 사용해 독창성을 발휘했다. 당시 발음이 편하고 소비자가 쉽게 주목할 수 있으면서 제품 속성을 명확히 전달할 수 있는 ‘네이밍’이 중요하다며 직접 임원들을 설득했다는 일화로도 유명하다.
매운맛을 강조하는 ‘농심 시그니처’ 광고로 오랜 기간 유명세를 떨친 ‘사나이 울리는 농심 신라면’이라는 카피는 신 회장이 직접 만들었다고 전해질 정도로 브랜딩 실력이 잘 알려져 있다.
또한 유기그릇으로 유명한 지역 명에 제사상에 오르는 ‘탕’을 합성한 안성탕면이나 짜장면과 스파게티를 조합한 ‘짜파게티’ 등 라면 이름에서도 반짝이는 네이밍 감각을 확인할 수 있다.
그가 스낵 분야에서도 한국을 대표하는 과자 ‘새우깡’을 스테디셀러로 만들어 낸 배경에서 브랜딩이 큰 힘으로 작용했다.
1971년 출시한 새우깡은 50년 역사상 국내에서 가장 잘 팔리는 대표 스낵의 자리를 꿰차고 있다. ‘손이 가요~ 손이 가~’라는 가사와 정감 있는 멜로디로 광고음악까지 국민 뇌리에 박혀 여전히 새우깡을 떠올리면 흥얼거릴 정도여서 성공한 마케팅 사례로도 손꼽힌다. ‘새우깡’이라는 이름도 당시 세 살이던 딸의 발음에서 착안할 정도로 마케팅 감각이 뛰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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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년 신춘호 농심 회장의 유럽 출장 당시 모습 [사진=연합뉴스] |
마케팅뿐 아니라 그가 생전에 강조한 ‘품질 우선’ 주의도 농심을 세계 최고의 식품회사 반열에 올려놨다.
스스로를 ‘라면장이’, ‘스낵장이’라고 부르던 그는 평소 직원들에게 장인정신을 강조했다. 회사 설립 시부터 연구개발(R&D) 부서를 따로 둘 정도로 품질에 강한 집착을 보였다. 그는 새우깡 개발 당시인 1971년에도 “맨땅에서 시작하자니 우리 기술진이 힘들겠지만, 우리 손으로 개발한 기술은 고스란히 우리의 지적재산으로 남을 것”이라며 4.5톤 트럭 80여대 물량의 밀가루를 사용하면서 연구개발에도 각별히 신경 썼다.
그는 저서 ‘철학을 가진 쟁이는 행복하다’에서 “돌이켜보면 시작부터 참 어렵게 꾸려왔다. 밀가루 반죽과 씨름하고 한여름 가마솥 옆에서 비지땀을 흘렸다. 내 손으로 만들고 이름까지 지었으니 농심의 라면과 스낵은 다 내 자식 같다”는 말을 남겼다.
그가 만든 라면은 국내뿐 아니라 세계시장에서도 날개 돋힌 듯 팔리며 농심이라는 이름을 전세계에 알렸다. 농심 라면은 1971년 첫 해외 수출 이래 현재까지 세계 100여 개 국가로 뻗어 나갔다. 지난해에는 해외 매출이 사상 최대인 9억 9천만 달러에 달했다.
농심이 지난 2011년 출시한 프리미엄라면 ‘신라면블랙’은 지난해 뉴욕타임즈가 꼽은 ‘세계 최고의 라면 1위’에 오르기도 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그는 당시 누구보다 환하게 웃었다는 말도 전해진다. 지난해 한국 영화 ‘기생충’이 오스카 상을 받으면서 세계적인 영화로 알려지자 영화 속에 등장하는 ‘짜파구리(짜파게티와 너구리를 섞어 조리하는 방식)’가 인기를 끌며 글로벌 히트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는 맨 땅에서 시작해 농심을 국내는 물론 세계 일류 식품회사로 키워냈다. 농심은 지난해 매출액 2조 6398억 원, 영업이익 1602억 원을 거두며 사상 최대 실적을 기록했다. 그는 올해 사내이사 자리에서 물러나면서 신동원 부회장에게 2세 시대를 열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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