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연금시장 벤치마킹 그룹 차원 확대…한국형 기금형 도입 선제 대응
[메가경제=이상원 기자] 국내 퇴직연금 시장이 기금형 제도 도입을 앞두고 새로운 전환점을 맞고 있다. 정부와 노사정이 기금형 퇴직연금 활성화에 공감대를 형성한 데 이어 오는 9월 구체적인 도입방안 발표가 예정되면서 제도 변화에 대한 금융권의 관심도 커지고 있다.
정부는 기존 계약형 제도와 기금형 제도를 병행하는 방향으로 제도 개편을 추진하고 있다. 금융기관 개방형과 연합형, 공공기관 개방형 등 다양한 형태의 기금 도입을 검토하면서 가입자의 선택권을 확대하고 가입자 이익을 최우선에 두는 것이 주요 방향으로 거론된다.
기금형 퇴직연금이 국내 시장에 안착하기 위해서는 이미 제도를 운영하고 있는 해외 사례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장기간 축적되는 퇴직연금 자산의 특성을 고려하면 자산운용뿐 아니라 가입자 확대와 거버넌스, 성과관리 등 제도 전반의 운영체계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3일 업계 관계자에 따르면 하나은행은 해외 기금형 퇴직연금의 운영 방식과 성공 요인을 파악하기 위해 지난해 호주와 영국을 직접 방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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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나은행 전경 [사진=하나은행] |
호주에서는 Mercer와 CFS 등 소매형 기금과 ART, Aware Super 등 산업형 기금 및 자산운용사를 포함해 10개 기관을 찾았고 영국에서는 NEST 등 6개 기금을 방문했다. 제도의 발전 과정과 지배구조, 자산운용, 가입자 관리 방식 등을 폭넓게 살펴보기 위해서다.
호주에서 하나은행이 주목한 부분은 퇴직연금을 장기자산으로 보고 다양한 자산에 분산투자하는 운용체계다. 호주는 1992년 Superannuation 제도 도입 이후 30년 넘게 기금형 퇴직연금 시장을 발전시켜 왔다. 주식과 채권뿐 아니라 부동산과 인프라 등 다양한 자산에 투자하면서 장기적인 관점에서 연금자산을 운용하는 구조를 갖췄다.
적립과 운용, 성과관리까지 제도 전반을 장기적인 노후자산 형성이라는 목표에 맞춰 설계한 것도 특징이다. 세제 혜택을 통해 자발적인 가입과 장기 적립을 유도하고 중도인출을 엄격하게 제한해 은퇴 이전 연금자산이 소진되는 것을 막는 방식이다.
성과관리 체계도 상대적으로 엄격하다. 호주 건전성감독청(APRA)은 Performance Test를 통해 기금의 운용성과를 지속적으로 평가한다. 성과가 부진한 기금에는 개선을 요구하거나 신규 가입을 제한하는 등 후속 조치를 통해 기금 간 경쟁을 유도하고 있다.
영국에서는 가입자 확대와 독립적인 거버넌스가 주요 벤치마킹 대상으로 꼽혔다. 영국은 2012년 Auto-Enrolment 제도를 도입하면서 퇴직연금 가입 기반을 크게 확대했다. 제도 시행 전 47% 수준이었던 가입률은 2025년 82%까지 높아졌다.
자동가입 확대와 함께 성장한 대표적인 제도가 Master Trust다. 여러 사업장이 하나의 기금에 참여하는 구조로 독립적인 트러스티 이사회가 기금 운영과 주요 의사결정을 맡는다. 가입자의 이익을 우선하는 독립적인 거버넌스가 핵심이다.
투자 경험이나 금융지식이 부족한 가입자를 위한 디폴트펀드도 활성화돼 있다. 대부분의 가입자가 별도의 투자상품을 직접 선택하지 않아도 전문가가 설계한 자산배분에 따라 퇴직연금을 운용할 수 있도록 해 가입자의 선택 부담을 낮추는 방식이다.
계약형과 기금형 제도가 함께 존재하면서 시장 경쟁이 이뤄지고 있다는 점도 영국 연금시장의 특징이다. 두 제도가 경쟁하는 과정에서 연금자산관리 서비스 개선이 촉진됐고 가입자가 부담하는 비용을 낮추는 효과도 나타났다.
영국은 Value for Money(VfM) 평가를 통해 투자성과뿐 아니라 수수료와 서비스 수준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경쟁력이 낮은 기금에는 개선이나 통합을 유도해 장기적으로 경쟁력을 갖춘 사업자를 중심으로 시장이 재편되는 구조다.
하나은행은 호주와 영국에서 확인한 연금제도 운영 사례를 은행 차원에 그치지 않고 하나금융그룹 차원의 논의로 확대했다. 해외 방문 이후 현지 제도와 운영 사례를 그룹 내 관련 계열사와 공유하고 국내 기금형 퇴직연금 도입에 대비해 필요한 역량과 대응 방향을 논의하는 회의체를 지속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특히 장기 자산운용과 독립적인 거버넌스, 전문적인 운용체계, 성과평가, 가입자 관리 등 해외 사례의 주요 요소를 국내 제도 환경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지 검토하고 있다.
하나은행 관계자는 “호주와 영국은 각각 다른 경로로 퇴직연금 제도를 발전시켜 왔지만 가입자의 노후자산을 장기간 축적하고 전문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제도와 운용체계를 지속적으로 보완해왔다는 공통점이 있었다”며 “해외에서 확인한 내용을 그룹 차원으로 확대해 국내 적용 가능성과 향후 제도 변화에 대한 대응 방향을 지속적으로 논의하고 있다”고 말했다.
기금형 퇴직연금 도입이 가시화하면서 향후에는 제도 자체보다 실제 운영체계가 시장의 성패를 가를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호주와 영국 역시 제도 도입 이후 장기간에 걸쳐 운용체계와 평가방식을 보완하며 현재의 연금시장을 구축했다.
가입자의 장기적인 이익을 중심으로 전문적인 자산운용 의사결정이 이뤄지고 성과와 비용, 서비스 수준을 지속적으로 점검하는 관리체계가 함께 마련돼야 한다는 의미다. 호주의 Performance Test와 영국의 VfM처럼 운용 결과를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필요할 경우 개선을 유도하는 장치도 국내 제도 설계 과정에서 참고할 만한 요소로 꼽힌다.
기존 계약형과 새롭게 도입되는 기금형이 각자의 장점을 바탕으로 경쟁하도록 하는 것도 과제다. 한 제도가 다른 제도를 대체하기보다 가입자가 자신의 상황에 맞는 방식을 선택하고 사업자 간 경쟁을 통해 퇴직연금 시장 전체의 운용성과와 서비스 수준을 높이는 구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나은행 관계자는 “호주와 영국 역시 오랜 기간 제도를 보완하면서 현재의 퇴직연금 체계를 만들어왔다”며 “우리나라 역시 해외 사례를 바탕으로 가입자의 장기적인 노후자산 형성을 중심에 두고 전문적인 운용과 성과관리, 가입자 선택권 등이 균형을 이루는 한국형 기금형 모델을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하나은행도 호주와 영국에서 직접 확인한 경험과 이를 바탕으로 이어온 그룹 차원의 논의를 토대로 향후 정부의 제도 방향에 맞춰 필요한 역량을 선제적으로 준비해 나갈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
하나은행은 해외 연금시장 벤치마킹에서 확인한 장기 자산배분과 성과관리, 가입자 중심 서비스 원칙을 퇴직연금 사업에도 적용하고 있다. 개별 상품 중심의 투자에서 벗어나 포트폴리오 기반 자산관리 서비스를 확대하기 위해 금융권 최초로 로보어드바이저 일임운용 서비스를 선보였고 은행권 최초로 전문가가 선정한 포트폴리오와 자산전략을 정기적으로 제공하는 하나MP 구독 서비스도 운영하고 있다.
최근에는 은퇴 이후 현금흐름까지 고려해 적립기에서 인출기로 연금관리 영역을 확대하고 있다. 디지털 서비스뿐 아니라 대면상담과 전문인력을 활용한 고객관리 체계를 강화하기 위해 연금 전문 상담센터인 연금 더드림 라운지를 지방권역까지 확대하는 등 가입 이후의 연금자산관리 서비스에도 힘을 싣고 있다.
운용성과에 대한 사후관리도 강화하고 있다. 성과가 부진한 디폴트옵션 상품을 업계 최초로 변경하는 등 상품을 공급하는 데 그치지 않고 운용성과를 지속적으로 점검하고 개선하는 체계를 구축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기금형 퇴직연금 도입을 앞두고 해외 선진 연금시장에서 확인한 운영 원칙을 국내 환경에 맞게 적용하려는 움직임이 금융권에서 본격화하고 있다"며 "하나은행의 해외 벤치마킹과 그룹 차원의 대응이 향후 국내 기금형 시장에서 어떤 경쟁력으로 이어질지 주목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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