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이 마침내 스튜어드십코드의 칼을 제대로 휘둘렀다. 표적은 조양호 대한항공 회장이었다. 지난 27일 열린 대한항공 정기 주주총회에서 2대 주주인 국민연금은 조 회장의 사내이사 연임 안건에 반대표를 던졌다. 이것이 결정타가 돼 조 회장 연임안은 근소한 표차로 부결됐다. 정관상 참석 주주의 3분의 2 이상 찬성이 필요했지만 조 회장은 64.09%의 찬성을 이끌어내는데 그쳤다. 조 회장은 이로써 대한항공의 최대 주주이면서도 회사 경영권을 박탈당하게 됐다.
이번 결정엔 국민연금과 같은 기관투자자들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다. 소액주주들의 의기투합도 조 회장의 경영권 박탈에 일조했다.
![[그래픽 = 연합뉴스]](/news/data/20190329/p179565879563760_399.jpg)
조 회장은 그간 한진그룹의 주력 계열사인 대한항공의 최고경영자(CEO) 역할을 수행해왔다. 그 세월이 올해로 만 20년이다. 이번에 국민연금이 스튜어드십코드를 발동하지 않았더라면 조 회장은 무난히 사내 이사 연임에 성공할 수 있었다. 이후엔 이사회에서 자연스레 대표이사로 재선임되는 과정을 거쳐 경영권을 유지했을 것이다.
그런 조 회장이었건만 이젠 주주들에 의해 밀려난 첫 번째 대기업 총수라는 달갑잖은 기록의 소유자로 남게 됐다. 인과관계를 따져보면 이는 스스로 자초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우선 조 회장 본인부터가 270억원에 이르는 배임 및 횡령 등의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다. 혐의 내용들도 국민들의 공분을 사기에 충분할 정도로 파렴치하다. 납품업체들로부터 거둬들인 이른바 ‘통행세’만 196억원에 달한다. 자신의 소송에 들어간 변호사 비용을 회삿돈으로 지출한 혐의도 받고 있다. 주주들의 소유인 상장사의 돈을 개인의 쌈짓돈처럼 마구 사용하다 재판에 넘겨진 것이다.
이뿐이 아니다. 딸과 부인이 일으킨 ‘땅콩 회항’, ‘물컵 투척’, ‘막말 고성 및 인신공격’ 등 오너 일가의 각종 갑질도 이번의 화를 초래하는데 힘을 보탰다. 도 넘은 갑질로 미운털이 단단히 박힌 것이 이 같은 사태를 불러온 것이다.
이번 일로 조 회장의 경영권은 큰 타격을 받았다. 대한항공 측은 이사 연임 실패가 경영권 상실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실제로 조 회장은 대한항공의 최대주주인데다 한진그룹의 지주회사인 한진칼을 지배하고 있다. 비등기 이사로서 회장직도 그대로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사회 참여를 봉쇄당한 조 회장의 대한항공에 대한 영향력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시장은 일단 이번 사태를 반기는 것으로 보인다. 오너리스크가 일정 부분 해소됐다는 판단이 그 배경에 깔려 있는 듯하다. 대한항공에 투명한 이사회 운영 시스템이 정착되기를 기대하는 목소리도 심심찮게 들린다.
그러나 국민연금의 스튜어드십코드 본격 적용이 긍정적 효과만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적용 범위가 확대되면 오히려 부정적 효과가 더 커질 것으로 확신한다.
가장 먼저 염려되는 것이 대기업들의 정권 눈치 살피기다. 지금처럼 국민연금이 정부의 영향권 아래에 있는 한 이는 불가피한 현상이다. 대기업들은 알아서 정권의 입맛에 맞는 경영방식을 취하게 된다. 주주나 기업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정권의 이익에 봉사해야 하는 상황을 맞을 위험성이 커진다. 이는 기업의 경영방식이 정권 교체에 따라 우왕좌왕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현재 국민연금 운용의 최고 결정기구는 기금운용위원회다. 위원회의 장은 보건복지부 장관이다. 전체 위원 20명 중 5명은 현직 장·차관이다. 여기에 연금공단 이사장까지 당연직으로 가세한다. 이 정도면 위원회는 사실상 유명무실한 기구라 할 만하다. 명목상 합의제를 채택하고 있지만 사실상 정권의 의도대로 굴러가기 쉽다.
스튜어드십코드의 칼날을 피하기 위해 기업주가 지분율 늘리기에 올인해야 하는 기형적 현상이 나타날 개연성도 있다. 투자에 써야 할 자금이 오로지 경영권 방어에 우선 투입된다면 이는 결코 바람직한 현상이라 할 수 없다.
대한항공은 국민적 공분을 삼으로써 오너리스크가 크게 부각된 특별한 기업이다. 그런 만큼 대한항공의 경우를 일반화하는데는 무리가 따른다.
국민연금의 스튜어드십코드는 연금 운용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다. 국민연금이 경영에 대한 전문성을 갖춘 것도 아니다. 따라서 응징 효과로 인해 때론 후련함을 느낄지 모르지만 본질적으론 위험한 제도다. 제도 자체를 철회하는 게 최선이다. 굳이 이 제도를 활용하려 한다면 국민연금의 독립성부터 제도적으로 완비하는 게 정도다. 그래야만 그 순수성이라도 인정받을 수 있다.
대표필자 편집인 류수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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