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 "주권면제 적용 안돼" 日상대로 재판할 권리 인정
日외무성, 주일대사 초치해 위안부 판결에 항의 [메가경제= 류수근 기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처음으로 승소했다.
재판부는 특히, 그간 일본 측이 주장해온 국제법상 주권면제 원칙에 대해 반인도적 범죄행위과 관련한 국제 강행규범을 근거로 이 사안에 대해 재판할 권리가 우리 법원에 있다고 인정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일본 외무성은 곧바로 일본 주재 한국대사를 초치하는 등 강하게 항의하고 나섰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34부(김정곤 부장판사)는 8일 고(故) 배춘희 할머니 등 위안부 피해자 12명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원고들에게 1인당 1억원을 지급하라"고 원고 승소로 판결했다.
![]() |
▲ 지난 12월 30일 오후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일본군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제1472차 정기수요시위' 현장에 2020년 돌아가신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를 기리는 글판이 놓여 있다. [사진= 연합뉴스] |
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우리나라 법원에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은 여러 건 있으나, 이 가운데 판결이 선고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재판부는 "증거와 각종 자료, 변론의 취지를 종합해볼 때 피고의 불법 행위가 인정된다"면서 "원고들은 상상하기 힘든 극심한 정신적·육체적 고통에 시달린 것으로 보이며 피해를 배상받지도 못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위자료 액수는 원고들이 청구한 1인당 1억원 이상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단돼 청구를 모두 받아들인다"고 판결했다.
![]() |
▲ 위안부 피해자 일본 손해배상 소송 주요일지. [그래픽= 연합뉴스] |
재판부는 특히 이 사건에 대해서는 ‘한 국가의 법원이 다른 국가를 소송 당사자로 삼아 재판할 수 없다'는 국가면제(주권면제) 원칙을 적용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이 사건 행위는 일본 제국에 의해 계획적·조직적으로 광범위하게 자행된 반인도적 범죄행위로 국제 강행규범을 위반한 것"이라며 "국가의 주권적 행위라고 해도 국가면제를 적용할 수 없고, 예외적으로 대한민국 법원에 피고에 대한 재판권이 있다고 본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원고들의 손해배상 청구권은 한일 양국이 1956년 맺은 청구권 협정이나 2015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 협의 적용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판시했다.
![]() |
▲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측 소송대리인인 김강원 변호사가 공판을 마친 뒤 밝은 표정으로 법정을 나서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
원고 소송대리인 김강원 변호사는 이같은 판결에 "감개가 무량하다"며 환영하는 뜻을 밝혔다. 그는 "배상금을 강제 집행할 방법이 있는지 별도로 검토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정의기억연대(이하 정의연)는 법원 판결과 관련해 서울중앙지법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피해자들의 절박한 호소에 귀 기울인 대한민국 법원 판결을 진심으로 환영한다"고 밝혔다.
정의연은 "이번 판결은 대한민국 헌법 질서에 부합할 뿐만 아니라, 국제인권법의 인권존중 원칙을 앞장서 확인한 선구적인 판결"이라며 "전 세계 각국 법원이 본받을 수 있는 인권 보호의 새 지평이 열렸다"고 평가했다.
정의연은 또 "일본 정부는 2015년 `한일 합의' 이후에도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며 일본군 위안부 피해 자체를 부인하고 있으며, 각국에서 평화의 소녀상 건립을 조직적으로 방해하는 등 위안부 문제 지우기에 혈안이 돼있다"고 비판했다.
이어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원고 중 상당수가 운명을 달리해 현재 피해 생존자는 5명에 불과해 시간이 없다"며 "일본 정부는 지체 없이 판결에 따라 배상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일본 외무성은 이날 한국 법원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에 대한 위자료 배상 판결을 내린 것에 항의해 남관표 일본 주재 한국대사를 초치했다.
![]() |
▲ 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에게 일본 정부가 배상해야 한다는 한국 법원의 판결이 내려진 직후 남관표 주일본 한국대사가 일본 도쿄도 지요다구 소재 외무성 청사에 들어가고 있다. [도쿄= 연합뉴스] |
남관표 대사는 이날 오전 도쿄 지요다구에 있는 외무성 청사 정문을 통해 들어간 뒤 9분 만에 나왔다.
남 대사는 취재진에 "일본 정부 입장을 들었다"면서 "우리로서는 한일관계에 바람직하지 않은 영향을 미치지 않고 해결될 수 있도록 가능한 노력을 하겠다는 얘기를 했다"고 말했다. 또 "이런 해결을 위해선 무엇보다도 차분하고 절제된 양국의 대응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고 언급했다.
가토 가쓰노부 일본 관방장관은 "이런 판결이 나온 것은 매우 유감"이라며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고 8일 정례기자회견에서 말했다.
그는 일본 정부는 자국에 대해 주권 면제가 적용돼 사건이 각하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누차 표명했다면서 이번 판결이 국제법상 주권 면제의 원칙을 부정한 것이라고 논평했다.
가토 관방장관은 한국과 일본 사이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는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다 해결됐으며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경우 2015년 한일 외교장관 합의에서 "최종적이며 불가역적인 해결이 일한 양국 정부 사이에서 확인도 됐다"고 강조했다.
그는 "한국이 국가로서 국제법 위반을 시정하기 위해 적절한 조치를 강구하도록 강하게 요구하겠다"며 13일 선고가 예정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가 낸 다른 소송은 주권 면제 원칙에 따라 각하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번 소송은 배 할머니 등이 2013년 8월 위자료를 청구하는 조정 신청을 제기하면서 시작됐다. 배 할머니 등은 일본 정부가 일제 강점기에 자신들을 속이거나 강제로 위안부로 차출했다며 1인당 1억 원의 위자료를 청구했다.
하지만 일본 측이 한국 법원의 사건 송달 자체를 거부해 조정이 이뤄지지 않았고, 원고들의 요청에 따라 법원은 2016년 1월 사건을 정식 재판에 넘겼다.
재판부는 이후 4차례의 변론 끝에 피해자들의 청구를 모두 받아들였다. 그러나 1심 판결이 나오기까지 피해 할머니 12명 중 7명이 세상을 떠났다.
소송을 낸 배 할머니는 2014년 사망했고, 공동 원고인 김군자·김순옥·유희남 할머니 등도 소송이 진행되는 동안 별세했다.
그동안 재판을 거부해온 일본 정부는 이날 판결에도 출석하지 않았다.
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우리나라 법원에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 여러 건 가운데 판결이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같은 취지로 이용수 할머니 등 20명이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 1심 판결은 오는 13일 나온다.
[저작권자ⓒ 메가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