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3조원을 굴리는 국민연금이 기업들의 ‘빅 브라더(big brother)’가 돼도 될까?
영국 소설가 조지 오웰은 ‘1984년’이라는 소설을 통해 사회를 통제하는 절대자를 ‘빅 브라더’로 칭했다. 문재인 정부가 최근 문제 기업들을 통제하기 위해 국민연금을 마치 빅 브라더처럼 활용하려는 정책들을 내놓고 있어 논란이다. 관치(官治)의 부작용과 함께 기금운용의 안정성 훼손이 우려되기 때문이다.
국민연금은 최근(2월 7일) 기금운용위원회를 열고, 현 정부 들어 오너 일가의 갑질 논란 등으로 물의를 일으킨 한진칼에 대한 경영 참여를 결정했다. 주주 의결권을 통해 감시를 강화하는 등 경영에 적극 참여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지난해 7월 스튜어드십 코드(기관투자가의 의결권 행사 지침)를 도입한 이후 국내의 첫 사례로 꼽힌다. 이를 계기로 향후 상장기업에 대한 국민연금의 입김이 한층 더 거세질 것으로 예상돼 기업들이 바짝 긴장하고 있다.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이 지난 2월 1일 오전 서울 중구 플라자 호텔에서 열린 2019년도 제2차 국민연금기금운용위원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news/data/20190215/p179565864211249_324.jpg)
실제로 국민연금은 올해 상장기업 주주총회부터 의결권 행사 방향을 사전 공개키로 했다. 대상은 국민연금의 지분율이 10% 이상, 전체 기금에서 차지하는 보유비중이 1% 이상인 기업의 전체 안건과 국민연금 수탁자 책임 전문위원회에서 결정한 안건 등이다. 이 경우 한진칼뿐 아니라 국내 중견·기업 상당수가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 대상이 된다. 비슷한 시기 국민연금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가 남양유업에 대해 배당확대 주주제안을 하기로 의결했다. 남양유업이 한진칼에 이은 두번째 주주권 행사 대상이 된 것이다. 증권업계에서는 이들 두 기업뿐 아니라 SK하이닉스, 네이버, 넷마블, 카카오 등도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 대상 기업이 될 가능성을 점치고 있다.
현재 국민연금은 130조원 정도를 국내 주식에 투자하고 있다. 보유 지분이 5% 이상인 기업만 해도 300여곳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국민연금이 주주권 행사를 하겠다고 밝히는 것은 해당기업에 주홍글씨를 새기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으로 기업들은 받아들이고 있다. 국민연금이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한 데 이어 최근 수탁자책임활동 가이드라인을 통해 저배당 기업, 오너갑질 기업, 사회적 책임이나 지배구조 하위 등급 기업 등을 중점 관리하겠다는 계획을 밝혔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 대상에 오르내린다는 소문만 돌아도 기업 이미지는 큰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사정이 이러니 국내 웬만한 기업들은 앞으로 국민연금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게 됐다.
(대)주주가 기업 경영에 대해 의결권을 행사하겠다는 것은 당연한 권리이다. 국민연금의 스튜어드십 행사 또한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국민연금의 재원과 운영 시스템 등을 감안할 때 주주권리만을 주장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에 따른 사회, 국가적인 부작용이 만만치 않을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먼저 국민연금은 그야말로 국민의 노후를 책임져야 할 소중한 자금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50년, 100년 후에도 계속 확장·유지되어야 할 자금이다. 그러기에 기금운영은 안전하고 수익성이 높은 곳에 투자하는 데 역점이 모아져야 한다. 정치적인 문제나 권력자의 취향에 따라 국민연금이 운영돼서는 결코 안 될 것이다. 국민연금이 그동안 국내외의 우량 채권이나 우량 주식 등에 집중 투자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 결과 1988년 기금 설립 이후 지난해까지 연평균 5.38%의 수익률을 보여왔다. 최근 3년 평균 3.96%라는 비교적 양호한 수익률을 유지해왔다.
하지만 주식시장은 국내외의 경제상황에 따라 급변 할 수밖에 없다. 정확히 예측하기란 더욱 어렵다. 언제, 얼마나 큰 손실이 발생할지도 모를 일이다. 실제 국민연금이 국내주식에 투자해 거둬들인 수익률은 지난해 11월까지 -16.57%~-14.00%에 이르렀다. 엄청난 손실이 지난해 내내 이어졌다. 다행히 해외 주식과 채권 등으로 근근이 연간 수익률을 지켜왔지만 안정적인 운영을 위해 잠시라도 방심해서는 안 된다.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 기준으로는 수익성을 최우선시해야 할 것이다.
![국민연금 포스터 [출처= 국민연금공단]](/news/data/20190215/p179565864211249_301.jpg)
여기에다 국민연금이 민간기업 경영에 깊숙이 개입할 경우 기업의 정상적인 경영활동을 압박하게 될 뿐 아니라 적대적 기업들의 공격 등 예상치 못한 각종 부작용도 초래할 수 있다. 전국경제인연합회도 최근 “국민연금의 한진칼 스튜어드십 코드 적용이 기업 전체로 확산될 경우 기업 활동을 더욱 위축시켜 투자나 일자리 창출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 우려했다.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은 “중요하고 명백한 위법활동으로 심각한 손해를 끼칠 경우에만 국민연금이 경영권을 행사할 것”이라고 말했지만, 기업들로선 국민연금이나 정부의 눈치를 보느라 투자 등 정상적인 경영활동에 지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가장 심각한 문제점은 정치 논리에 휘둘릴 위험이 크다는 데 있다. 정권의 입맛에 따라, 운영 책임자들의 정치적인 성향에 따라 얼마든지 경영권 참여의 기준이 바뀔 수 있다는 취약성과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다. 관치(官治) 수단으로 전락할 위험성이 높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국민연금의 결정이 정부와 정권의 압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면 기금운영위의 인적 구성부터 바꿔야 한다. 복지부 장관, 4개 관련 부처 차관, 국민연금 이사장 등 친여권 인사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20명의 기금운영위원회의 인적 구성을 재조정하는 등 시스템 개선을 서둘러야 할 것이다.
이와 함께 국민연금이 정권과 그 추종단체 등의 눈 밖에 난 기업을 손보는 수단으로 전락되지 않도록 다시 한번 제도 전반을 살펴볼 일이다. 온 국민의 소중한 노후자금이 부실운영되거나 특정 정파를 위한 새로운 ‘빅 브라더’가 돼서는 결코 안될 것이다.
이동구 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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