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특허청은 개청 40주년을 맞아 '우리나라를 빛낸 발명품 10선'을 발표했다. 공산품 중 가장 높은 순위로 5위에 커피믹스가 올랐다.
이 내용은 페이스북 이용자 57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것으로, 전문성보다는 대중들의 인식을 보여준다. 1위부터 4위까지가 훈민정음, 거북선, 금속활자, 온돌 순이니 요즈음 사람들에게 커피믹스의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케 한다.
'커피믹스'의 40여년 주도 기업이 바로 동서식품이다. 90% 가까운 시장점유율이니 독점이라고 불러도 무방하다. 최근 커피를 즐기는 취향도 다양화됐지만, 인스턴트 커피 부문은 여전히 절대강자다.
닐슨 시장 조사에 따르면 2021년 4월까지 판매 금액 기준 커피믹스 시장점유율을 보면 동서식품이 88.3%다. 남양유업이 7.2%, 롯데 네슬레가 3.4%를 차지한다.
인스턴트 원두커피 역시 동서식품 카누가 89.7%, 남양유업 루카스9이 2.9%, 롯데 네슬레 크레마가 3.5% 수준.
커피믹스 분야는 동서식품의 아성이나 다름 없다. 시장점유율은 2019년 87.4%, 2020년 88.6%로 큰 변동이 없다.
![]() |
▲동서식품의 커피믹스 베스트셀러 '맥심 모카골드' (사진 = 동서식품 제공) |
인스턴트 커피, 한국에선 어떻게 자리잡았나?
동서식품은 커피믹스를 1976년 최초 개발했다고 주장한다.
커피는 한국인들이 즐기던 음료가 아니었다. 구한말에야 한반도에 들어온 것으로 추정되며, 고종이 커피를 즐겼다는 사실 정도를 확인할 수 있다.
인스턴트 커피가 전 세계적으로 널리 보급된 것은 전쟁의 영향. 특히, 한국전쟁 이후 미군들에 의해 한반도에 본격 상륙한다.
전후 혼란기 속에서 '미제 커피'는 정식 수입 루트가 아니라 미군 PX를 통해 흘러나온 '부정물품'이 범람했다.
1959년 6월 21일자 동아일보는 압수된 인스턴트 커피 사진과 함께, 공식 수입된 커피의 10배 넘는 양이 미군 PX에서 흘러나왔다고 보도한다.
5.16 쿠데타 이후 군사정권은 커피 수입을 전면 금지한다. 하지만 이런 조치로 밀수품 시장은 더 기승을 부린다. 하물며 커피 가격이 올라가며 가짜도 횡행한다. 당시, 다방에선 담배가루를 섞은 가짜 커피로 백 잔 분으로 삼백 잔으로 늘려 파는 경우가 사회 문제로 불거지기도 한다.
결국 군사정권은 원두를 수입해 국내 기업이 가공한 후 판매하도록 허가했는데, 동서식품이 바로 주인공.
동서식품이 인스턴트 커피 생산을 위해 제휴한 회사가 바로 맥스웰하우스로 유명한 제너럴 푸즈다. 이 제너럴 푸즈가 1968년 새로 론칭한 커피 브랜드가 전설로 남을 '맥심'이다.
인스턴트 커피는 빠르게 시장을 장악했다. 하지만 커피믹스는 지금 갖고 있는 위상과 비교하자면 그 출발은 미약했다.
'맥심' 역시 병에 든 인스턴트 커피가 주를 이뤘다.
초창기 커피믹스는 등산, 낚시 등 야외활동 때 이용할 수 있는 물건으로 인식됐고, 과거 다양한 매체에 실린 커피믹스 광고를 봐도 그렇게 홍보되고 있었다.
그렇다면 커피와 설탕, 프림 등이 한 데 들어있는 커피믹스는 언제부터 인스턴트 커피 시장을 주름잡게 됐을까?
판매량을 중심으로 보자면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이 두드러진다.
항간에는 IMF 외환위기를 겪으며 대량의 정리해고 인원이 발생하자, 사무실에서 직장인들이 타 마시던 인스턴트 커피도 간편한 믹스 제품으로 대체됐다는 설도 나돈다.
외환위기 이후 경제가 다시 고성장기에 접어들 무렵, 당시 많은 매체는 소위 '벤처 붐'에 대한 소개 기사를 종종 기획했다. 이런 기사에서 눈에 띄는 내용 중 하나는 기업문화, 조직문화의 변화상이다.
직장에서 하급자들이 으레 하던 커피 심부름이 없어지게 된 것.
이보다 앞서 1990년대 초반에는 대기업들을 중심으로 경영효율을 높이기 위한 '시(時)테크'에 대한 운동이 붐을 이뤘다.
한국경제의 1996년 6월 28일자 기사를 참고하면, "여직원들이 타주는 커피 한 잔을 비용의 개념"으로 말한다. 그 즈음 삼성전자의 시테크 경영 보고서를 찾아보면, "커피 한 잔의 비용은 여직원이 타줄 때 인건비를 감안하면 3134원, 직접 타 마시면 1800원"이라고 계산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직장 환경에 냉온수기나 정수기가 비치되기 시작하고, 병 커피를 쓰자면 공유할 수밖에 없는 티스푼 등에 대한 위생의식이 변화한 탓이 커피믹스의 새 시장을 열었다.
음식점 등에서도 '앞접시'가 등장하기 시작하고, 간염 전염 우려 등을 근거로 덜어먹기가 위생적이란 기사가 연이어 지면을 장식했던 시절이다.
신생 주자의 매서운 한 방···유일하게 80% 시장점유율 함락
2000년대 중반 커피믹스 하나로 동서식품은 4000억원이 넘는 매출을 올린다. 개별 브랜드로서 매출 규모는 당시 모든 식품 분야를 통틀어 최고 수준.
현재처럼 85% 이상의 독점적 점유율을 공고히 한 것도 그 즈음이다. 2007년, 2008년 당시 커피믹스 시장의 경쟁은 맥심 제품들 끼리 싸움이라고 볼 정도.
동서식품의 아성에 도전장을 낸 것은 남양유업이었다.
2010년 커피믹스 시장에 진출한 남양유업은 이미 탄탄한 히트상품 라인업으로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1964년부터 노하우를 가진 우유와 분유 제품은 아인슈타인, 불가리스 등의 히트 브랜드가 떠받치고 있었다. 주특기인 유제품의 연장 선상에서 '악마의 유혹 프렌치 카페'라는 용기형 커피음료도 대박이 난다.
새로 진출한 커피믹스 브랜드명도 프렌치 카페다. 당시 인기 절정에 있었던 탤런트 김태희를 모델로 남양유업은 동서식품을 향해 강공 마케팅을 선보인다.
화학 합성첨가물을 뺐다는 주장인데, 바로 업계에서 크게 이슈였던 '카제인나트륨' 논란이다.
남양유업은 자사 프렌치 카페에는 카제인나트륨이 들어간 프림이 아니라 우유가 들어갔다고 광고한다. 유제품에 강점을 가진 기업의 홍보는 소비자들에게 크게 어필한다.
동서식품의 입장에선 무척 할 말이 많았을 것이다. 카제인은 우유의 주요 단백질인 일종의 인단백질이다. 물에 잘 녹지 않는 카제인을 수산화나트륨 등으로 물에 잘 녹게 만든 성분이 카제인나트륨이다.
화학적 합성품이 몸에 안 좋을 거 같은 이미지 때문에 오해를 샀지만, 사실 카제인나트륨은 국제식량농업기구와 세계보건기구 합동 식품첨가물 전문가위원회(JECFA)가 1일 허용섭취량을 정하지 않을 정도로 안정성이 뛰어난 물질이다. 국내서도 식품의약품안정청이 허가한 유화제다. 프림 등 유제품만이 아니라 마요네즈, 케첩 등에도 다양하게 쓰인다.
하지만 중국산 '멜라민' 우유 파동 등을 겪고 소득 수준 향상 등으로 눈높이가 높아진 소비자들은 경계의 눈초리를 풀지 않는다. MSG의 유해성 논란이 여전히 진행형인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는 대목.
분유도 폭 넓게 팔고 있던 남양유업 제품에도 역시 카제인나트륨이 쓰인다. 하지만 남양유업이 동서식품의 공성무기로 카제인나트륨을 언급한 그 순간부터 묘한 '프레임'이 구성된다.
동서식품이 해명을 하면 할수록, 오히려 카제인나트륨을 뺐다고 광고한 프렌치카페가 회자될 수밖에 없는 구조.
남양유업이 진출하기 이전, 시장점유율 격차는 어쩔 수 없지만 동서식품의 유일한 대항마는 두산그룹 계열이다 롯데로 넘어간 네슬레코리아였다. 하지만 신생 주자는 1년 만에 점유율 2위로 올라선다.
닐슨 자료에 따르면, 국내 커피믹스 시장점유율에서 동서식품이 유일하게 80% 선이 무너졌던 것이 2012년 당시다.
남양유업은 11.9%까지 시장을 점유하며, 2위였던 네슬레를 6.0%로 밀어내고, 동서식품의 독점 구도를 79.3%까지 공략한다.
2012년말 기준으로 남양유업은 12.5%, 2013년 13.4%까지 치고 올라오며 피크를 찍는다.
하지만 맥심의 아성을 넘보던 프렌치카페는 전혀 생각지 못한 곳에서 풍랑을 만나니, 바로 2013년 터진 남양유업의 대리점 밀어내기 논란이다. 앞서 카제인나트륨 논란에서 벌어졌던 상황은 되돌아와 남양유업에게 독화살이 됐다. 이후 갖은 구설과 논란거리를 낳았던 남양유업은 좀처럼 경영회복에 이르지 못하고 결국 총수 일가가 물러나게 된다.
![]() |
▲인스턴트 커피 브랜드 카누 (사진 = 동서식품 제공) |
형보다 나은 아우? 맥심 아성 이어 받은 카누
소비자들에게 가장 대중적인 음료인 커피는 분명 트렌드가 변화했다. 주로 언급한 커피믹스부터 시작해, 인스턴트 커피 시장은 현재 내리막길로 보고 있는 이들도 많다.
식품산업통계정보에 따르면 2018년 커피믹스가 포함된 조제커피 시장은 2400억원대.
특히 커피 전문점이 우후죽순 늘어나고, 입맛이 고급스러워진 소비자들은 '홈카페'에 열광하고 있다.
하지만 그 옛날에도 '부자 망해도 3년 간다'는 속담이 있었는데, 30년 독점 가까운 시장점유율을 누렸던 동서식품이 가만히 있었을까?
2011년 10월 동서식품은 스틱형 인스턴트 커피 '카누'를 출시한다.
기존에 병에 들어있던 인스턴트 커피를 그냥 소포장한 게 아니라, 원두 가루를 첨가해 맛과 향에서 차별점을 두었다고 홍보한다.
실제로 어떤지와 별개로, 카누는 소비자들에게 반향을 이으킨다. 출시 1년도 안 되어, 당시 인스턴트 커피 시장 전체 매출의 7%를 점유한다.
인스턴트 원두커피 시장점유율은 80% 수준에서 꾸준히 상승해 90%를 앞두고 있다. 커피믹스보다 훨씬 더 다양한 주자들이 난립하고 있는 시장임에도 불구하고, 카누의 지위는 오히려 더 확고해 보인다.
[메가경제=박종훈 기자]
[저작권자ⓒ 메가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