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가경제=편집국] 최초의 서울역이었던 경성역은 서대문역으로 변경된 후 1919년 3.1만세운동 집결지로 이용되면서 폐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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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上은 경성역 신축 전 남대문역 中은 신축공사 중(1924.10월)下는 경성역 준공(1925.09.30.) |
이후 경성역으로 불리던 서울역은 한동안 존재하지 않았으며, 경인선과 경부선의 시·종착역 역할은 남대문역(南大門驛 : South-Gate Station)이 담당하였고, 1910년 10월1일부터 조선총독부 철도국에서 경영하던 한국철도의 경영이 1917년 7월31일부터 남만주철도주식회사(이하 ‘만철’이라 함)에게 위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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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공 당시 경성역 |
만철은 1918년 남대문역 개축계획을 세우고(1918.04.26. 및 12.29일 부산일보), 1922년 6월1일 착공 후 1923년 1월1일 자로 역명을 경성역으로 변경함에 따라 두 번째 서울역이 탄생한 것이다.
만철의 조선철도 경영은 완공 직전인 1925년 4월1일 종료됨에 따라 조선총독부 철도국으로 환원된 후 9월 말 준공되어, 10월15일부터 새 역사에서 업무가 시작되었고, 역무실은 지하층, 1층에 역장실과 귀빈실, 1, 2등 대합실 및 1, 2등 부인 대합실과 3등 대합실, 2층에 귀빈식당과 대식당 등이 있었으며, 당시 귀빈식당에서 사용되던 식탁과 의자 및 집기들은 현재 철도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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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빈실 이모저모 |
특이하게 1, 2등 부인 대합실이 별도로 설치되었으며, 귀빈실은 왕실 전용으로 1945년 최초의 한국인 서울역장 이종림(전 교통부장관)은 1946년 미・소 공동위원회 참석 소련 대표단으로부터 서울역 도착 시 귀빈실을 비워두라는 요청에 대통령 가족만 사용하는 곳이라며 거절 후 소련 대표 참석이 변경될 때까지 거절에 대한 후환을 염려했던 기록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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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 서울역 |
2017년 3월 동아일보는 한국영상자료원이 외국에서 수집하여 공개한 영상을 소개하는 기사에서 “광복 당시 서울역 광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깃발을 들고 있으며, 성조기와 영국 국기 그리고 중국 국민당 깃발을 든 사람도 있고, 호주 연합군을 향해 조선인들은 저마다 쥐고 있는 깃발을 흔들며 환호하였다.”고 보도하며 당시 서울역 모습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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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이 처음 새겨졌다. |
1919년 3월1일 만세운동 때에 이어 1945년 8월15일 해방을 맞아서도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모여지는 곳이 서울역 광장이 된 것이다. 일제의 항복에 따라 한국철도는 미군정에서 맡게 되었으며, ‘서울역’이 처음 새겨졌다
당시 철도종사원 7만9000명 중 일본인이 2만3000명이었으며, 1945년 9월1일 미군정청 교통국장에 워드 L. 해밀턴 중령이 임명된 후 12월1일 한국인 김진태(金鎭兌) 교통국장이 임명되었으며, 1947년 11월1일 경성역이 드디어 서울역으로 개칭됨에 따라 ‘서울역’이라는 공식적인 명칭이 처음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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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중 미군 측에서 촬영한 서울역 사진으로 1950년 9월 25일 서울탈환 작전 시 모습으로 추정됨. |
1950년 6월25일 북괴의 남침이 시작된 다음 날, 적기가 교통부 청사를 공격하여 순직자가 발생하면서 문산, 의정부, 춘천지구 철도종사원들의 철수에 이어 6월27일 서울, 용산지구 철도종사원이 철수한 후 UN군 지원으로 9월 15일 미 제10군단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에 이어 9월28일 서울을 탈환하였고, 1950년 10월3일부터 서울역 기능이 다시 시작되었다.
구 서울역 광장 동상 강우규의사는 1919년 3.1만세운동으로 3월 말 첫 번째 서울(京城)역이었던 서대문역이 폐지된 후 경성역 역할을 하던 옛 남대문역 광장에서 1919년 9월2일 당시 일제 총독 사이코 마코토(斎藤 実)를 향해 폭탄을 던지셨던 분으로 동상은 구 서울역사의 기능이 종료된 후 2011년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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